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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기록

<프리마 파시>를 보고, 정의와 진실은 무엇인가

by 지패뉴 2025. 10. 10.

 

 

최근 나는 판소리로 유명한 이자람의 일인극 프리마파시를 관람했다. <프리마 파시>는 라틴어로 "겉보기에는"이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법률적으로는 '우선은 증거가 충분해 보여 더이상 증명이 없어도 사실로 간주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겉으로 드러난 증거만으로 유죄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을 말한다. 이 연극의 제목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연극의 제목이 <프리마 파시>인 이유?

 

이 연극은 주인공 테사(Tessa)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1인극이다. 테사는 법조계에서 정황 증거만으로 사건을 판단하며 승승장구해온 유능한 여성 변호사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사건을 겪으며, 자신이 믿어온 법체계가 피해자인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모순을 깨닫게 된다. 이 지점에서 ‘프리마 파시’라는 용어는 단순한 법률적 개념을 넘어, ‘겉보기에 명백해 보이는 정의’와 ‘실제 정의’ 사이의 간극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연극은 이를 통해 법과 정의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구현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칙과 시스템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현실에 맞게 수정되고 적용되며, 결국 사람들은 이를 보편적이고 인류적인 가치라고 인식하게 된다. 법정에서 정의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술을 ‘진실’이라고 믿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프리마 파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법적 정의와 실제 진실 사이의 괴리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배후 혼자 이끌어가는 120분의 호흡

이자람은 무대 위에서 변호사, 피해자, 증인, 판사 등 다양한 인물을 혼자서 표현한다. 시선 처리, 말투, 표정, 제스처를 정교하게 조절해 인물 간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쉬는 틈 없이 관객(배심원으로 상징됨)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특히 대사량이 방대하고 속도감이 매우 빠른 전개 속에서, 변호사로서 사건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장면과 피해자로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장면의 대비가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 두 스타일의 전환은 극의 감정선과 긴장감을 극대화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120분 내내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프리마 파시>는 단순한 법정 드라마를 넘어, ‘정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이자람의 압도적인 1인 연기와 판소리로 다져진 발성과 리듬감, 그리고 치밀한 감정선은 공연의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전달한다. 법과 사회, 진실과 정의의 틈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이 작품은, 관객에게 깊은 여운과 질문을 남긴다.

 

 

판소리꾼 이자람의 저력을 보여준 무대

약 2시간에 걸쳐 긴 호흡의 대사가 이어지는 이 무대는, 말 그대로 배우의 에너지가 공연의 분위기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반에는 자신감 넘치는 승승장구하는 변호사의 모습으로 시작해, 이후 피해자로서 체제의 모순을 고발하고 호소하는 목소리로 점차 감정선이 변화한다. 이러한 감정의 점층적 표현이 매우 탁월해 관객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점은 배심원으로 상징되는 관객과의 소통 방식이다. 주연 배우는 그간 판소리를 통해 단련해온 발성과 호흡, 몰입도 높은 연기력을 바탕으로 관객과 강렬한 교감을 이끌어낸다. 단순히 대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관객이 공연의 일부가 된 듯한 현장감을 선사한다. 이 공연의 핵심은 바로 배우의 몰입도와 관객과의 호흡이다. 무대와 객석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몰입감은, 이 작품이 단순한 연극을 넘어 강렬한 메시지와 감정의 파동을 전달하는 공연임을 증명한다.

런던 초연 조디 코머(Jodie Comer)와 차이를 비교!

이 연극은 런던 초연 당시 배우 조디 코머(Jodie Comer)의 열연으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조디 코머는 런던 공연뿐 아니라 브로드웨이 무대에서도 관객과 평단의 압도적인 찬사를 받으며, 이 작품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법정에서 피해자로 증언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보여준 섬세하고 치밀한 감정 연기는 큰 감동을 안겼다. 그 결과 조디 코머는 미국의 권위 있는 토니상(Tony Awards)과 영국의 올리비에상(Olivier Awards)에서 여우주연상(Best Actress)을 동시에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수상 소감에서 조디 코머는 이 작품의 원작자인 수지 밀러(Suzie Miller)에게 감사를 전하며, 이 연극이 자신을 변화시켰고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목소리의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조디 코머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유튜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상 속 그녀는 강렬한 제스처와 리듬감 있는 연기, 그리고 폭발적인 에너지로 관객을 압도한다. 반면 한국 무대에서 <프리마 파시>를 이끈 이자람떨림과 절제를 오가는 세밀한 감정선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무대를 완성한다. 이 두 배우의 표현 방식의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은 <프리마 파시> 공연을 감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 관람 포인트 중 하나다. 조디 코머의 직선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연기와, 이자람의 섬세하고 절제된 표현은 같은 작품이지만 전혀 다른 감정의 결을 선사한다.

 

https://youtu.be/tOQ7YsxkVUQ?si=W85yhugTsstUu-W8

 

 

페미니즘에 대한 알아보기

 

이 연극을 페미니즘 연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일상 속에서 자주 사용하면서도, 정작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1960~70년대에 등장한 래디컬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이 사상은 가부장제를 단순한 문화나 관습이 아닌 여성 억압의 근본적 사회 구조로 규정한다. 따라서 점진적인 개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사회적 관계와 권력 구조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적·신체적 자율권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며, 사회 이슈에 강하게 대응하고 여성 집단 간의 자매애(sisterhood)를 강조하는 것도 큰 특징이다. 1990년대 이후, 페미니즘은 활동 방식이 다양해지고 개인과 집단의 발언권이 확대되면서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이는 성별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이주 배경, 장애 등 다양한 정체성에 따라 억압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관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모든 여성이 동일한 억압을 경험한다는 전제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차별 경험을 교차적으로 분석하고 대응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과거처럼 단순히 ‘남성 대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머물지 않는다. 대신 개인의 정체성 다양성과 사회 전반의 불평등 구조를 다층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권리 요구 운동을 넘어, 사회 전체의 구조와 인식을 변화시키려는 현대 페미니즘의 중요한 특징이다.페미니즘은 시대에 따라 초점과 방법론이 변화해왔다. 래디컬 페미니즘이 가부장제 구조 해체에 집중했다면, 현대 페미니즘은 교차성 개념을 통해 다양한 정체성과 억압의 양상을 함께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이러한 흐름은 연극, 예술, 학문 등 다양한 분야에도 영향을 미치며, ‘페미니즘 연극’이라는 해석이 등장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여성은 사회적 약자일까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과연 사회적 약자로 볼 수 있을까? 법적·제도적 측면에서 한국은 헌법을 비롯해 여러 법률을 통해 남녀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평등권이 보장되는 국가다. 그러나 현실은 다소 다르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OECD 국가 중 높은 수준이며, 여성 국회의원 비율과 기업 임원 비율 또한 여전히 낮은 편이다. 이러한 수치는 제도적 평등과 실제 사회에서의 격차 사이에 간극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여성은 오랜 역사 동안 가사와 양육의 역할을 전담하며, 경제적·정치적 의사 결정 구조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며, 이는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떠밀린 결과에 가까운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을 ‘사회적 억압’으로 볼 것인지, ‘개인의 선택’으로 볼 것인지는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자 할 때 육아·가사 영역에서 충분한 제도적 보호와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아 원하는 경로나 꿈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된다. 또한 여성 스스로가 자신을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며 보호만을 요구할 경우, 오히려 자신의 주체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최근에는 ‘여성’이라는 젠더 구분만으로 사회적 약자를 정의하기보다는, 개인의 경제적·사회적 상황이 더 중요한 변수라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의 권익 신장과 더불어, 사회복지와 제도적 보호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균형 있게 지원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개인이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공정한 기회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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