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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기록

<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이 소설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

by 지패뉴 2025. 10. 9.

📚 통영을 무대로 한 3대 가족의 비극과 생명력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은 1864년 고종 즉위부터 1930년대까지,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한 가문 3대에 걸친 삶을 그린 대작이다. 배경은 통영, 사시사철 따뜻한 날씨와 풍부한 수산 자원으로 어업이 발달한 도시다. 이곳은 ‘조선의 나폴리’로 불릴 만큼 아름답고, 어장아비(어장을 경영해 자본을 축적한 사람)들이 많아 자본주의에 익숙한 독특한 시골 마을이었다. 소설은 이러한 통영의 지역적 특색과, 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격랑 속에서 흔들리는 가족의 역사, 그리고 여성들의 욕망과 운명을 정교하게 묘사한다.

🌊 통영, ‘조선의 나폴리’ — 배경의 생생한 묘사

작품의 첫 장은 마치 관광서처럼 통영의 자연과 문화를 묘사하는 부분으로 시작한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어업 외에 규모가 작지만 특수한 수공업도 이곳의 오랜 전통의 하나다. -본문 중

 

어업뿐만 아니라 수공업도 발달했으며, 제주 말총으로 만든 통영갓, 정교한 세공으로 유명한 통영 소반, 그리고 소라·전복 껍데기로 만든 나전칠기 가구들이 등장한다. 거칠고 조야한 어업 환경 속에서 이런 섬세한 공예가 발전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 시대적 배경 — 조선의 몰락과 근대의 도래

1864년 고종의 즉위와 대원군의 집권, 병인양요 이후 경제의 파탄과 민비의 권력 장악, 개화파와 보수파, 친일·사대파의 대립 등 나라는 점점 기울어간다.
한일합방(1910) 이후 20년 뒤, 김약국의 아들 김성수를 중심으로 소설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성수는 오해로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와, 억울함에 독을 먹고 죽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한실댁과 결혼해 다섯 명의 딸을 낳는다.

👨 김성수가 ‘김약국’이라 불린 이유

성수의 아버지는 관약국이라는 약국에서 일했고, 중인 출신이었지만 조상은 이 지역의 호족이었다. 성수의 형 봉룡은 난폭하고 황색 머리털을 가진 인물로, 이 황색 머리는 훗날 다섯째 딸 용혜에게로 유전된다. 김성수는 십 년 전부터 약국을 그만두고 어장을 경영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김약국’이라 불렀다.

🧓 한실댁 — 전통적 어머니의 상징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한실댁은 그 모든 애정을 자식들에게 쏟아붓는다. 한실댁은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를 자식을 통해 실현하려는 전통적인 어머니상이다. 그녀는 가부장제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직접 드러내지 못하고, ‘모성’을 통해 우회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이는 19~20세기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한된 방식 중 하나였다.
→ 한실댁은 가부장제의 구조에 순응하면서도, 자녀를 통해 ‘자기 확장’을 시도한 여성이다.

한실댁은 그 많은 딸들을 하늘만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자식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려 한다.

👩 다섯 딸의 삶 — 시대와 욕망의 초상

 

1️⃣ 용숙 : 전통과 현실 사이에서 생존하는 여성

신앙심은 있으나 상황에 따라 무당굿도 하는 이중적 인물이다. 성격이 고약하고,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단정히 빗어 고급스러운 외양을 유지한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청상과부로 강한 생존력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맏딸 용숙은 신앙심과 미신을 오가는 이중적 정체성을 지닌다. '성격이 고약'하고,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단정히 빗어 고급스러운 외양'을 가진 생존력 강한 청상과부로서 전통적 여성 역할과 세속적 욕망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 가부장제 구조에 순응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적응해 살아남은 실용적 여성상으로 볼 수 있다.

 

2️⃣ 용빈 : 지성과 신앙을 겸비한 ‘아들 역할’을 부여받은 여성

이마가 넓고 눈매가 시원한 인상으로 강한 지성과 사려 깊음을 지닌 인물이다. 선교사의 권유로 교육을 받고 성장하며, 집안의 대소사를 아버지와 상의하는 정신적 중심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냉정한 태도와 어머니의 존재가 무시되는 상황에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용빈은 아버지의 신임을 받으며 사실상 집안의 아들 역할을 수행한다. 교육을 받고 지성·신앙을 지니지만, 여성으로서의 위치와 역할 사이에서 복합적 내적 갈등을 겪는다.
‘여성의 주체성’과 ‘가부장제의 대리인 역할’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남성의 빈자리를 채우지만,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욕망과 한계를 자각한다.

 

3️⃣ 용란 : 본능적 욕망과 순수함을 지닌 여성

용빈과 대조되는 인물로, 아름답고 순수하지만 충동적이고 운명에 휩쓸리는 인물이다. 머슴 한돌이를 사랑하지만 이루지 못하고, 아편쟁이의 집에 시집간 후 다시 한돌이를 만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그녀는 ‘천사와 암수의 양면’을 모두 지닌 상징적 인물이다. 용란은 사회적 규범보다는 감정과 본능에 따라 사랑을 선택하지만, 가부장제와 사회적 시선의 장벽에 부딪혀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그녀는 ‘순수함=죄 없음’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여성의 성적 주체성이 사회적으로 억압되는 구조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 ‘순수한 여성’으로 낭만화되면서도, 실제로는 구조에 의해 희생되는 여성상이다.

 

4️⃣ 용옥 : 신앙과 전통에 얽매인 비극적 여성

신앙심이 깊지만, 결혼 후 시아버지에게 몹쓸 일을 당할 뻔해 배에서 도망치다 죽는 비극적인 캐릭터다. 용옥은 깊은 신앙심을 지니지만, 시댁의 폭력적 구조와 사회적 보호의 부재 속에서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는다.
개인적 신앙이나 도덕성만으로는 가부장제와 사회적 억압을 극복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도적 보호가 결여된 여성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5️⃣ 용혜 :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성

노란 머리카락을 물려받은 막내딸로, 서사 후반부에서 용빈과 함께 통영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는 존재다.막내 용혜는 노란 머리카락이라는 사회적‘이질성’과 김약국집안의 유전을 지니고, 결국 용빈과 함께 통영을 떠난다. 비중은 작지만, 이는 기존의 통영·가부장제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김약국 핏줄의 상징적 인물이다.
→  끝없이 이어지는 비극 속에서도 지지 않는 생명력으로 대표되는 인물이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형은 관약국이라는 약국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신분은 중인, 하급관리 였으나
그의 조상은 이 지방의 호족이었고 살만한 인생이었다. 김약국의 아버지 봉룡은 점잖은 형과는 달리 광기가 번득이는 난폭자로
머리털이 노란 흠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머리털이 노란것이 양놈의 피가 섞였다 하여 흠이었던 모양이다. 

* 나중에 이 노란머리는 다섯번째 딸 용혜에게로 물려진다. 김약국이 용혜를 노랭이라 부르며 사랑했다는 대목은 기구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운명(핏줄)을 사랑하는 의미를 담는다. 

✍️ #용빈이 케이트에게 용란에 대해 말하는 장면 :도덕적 시선과 여성성의 충돌

용빈은 용란의 사랑을 ‘사랑이라기보다 본능’으로 규정한다. 그녀는 용란의 행동을 신선하면서도, 표현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바라본다. 신앙심과 교육을 갖춘 용빈은 이성적·도덕적 관점에서 용란의 행위와 성적 순수함을 평가한다.

“그 여자는 사랑을 느끼기보다 본능에 움직였어요… 천사처럼 순진한 그의 인간성에서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어요.”

 

이 발언에서 드러나는 것은 용빈의 복합적인 감정이다. 한편으로는 용란의 순수함을 ‘천사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악덕과 수치를 모르는 상태’로 규정한다. 이는 용빈이 가진 기독교적·이성적 가치관과 용란의 본능적 여성성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 용빈은 지성인·신앙인으로서 용란의 사랑을 ‘순수’와 ‘위험한 본능’ 사이에서 해석한다.
  • 용란은 사회 규범 밖의 본능적 여성성의 상징이며, 용빈은 그것을 언어화하면서도 혼란을 느낀다.
  • 이는 자매 간의 대비이자, 여성 안의 다양한 정체성의 충돌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여성 내부의 시선, 즉 여성 간의 도덕적 판단과 해석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용빈은 남성 중심 사회가 설정한 ‘순결-욕망’의 이분법을 내면화하고 있고, 용란은 이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두 자매의 관계는 단순한 인물 대비가 아니라, 여성 주체성의 다양한 형태와 그 사이의 갈등을 상징한다.

✍️ 작가 박경리와 주제 의식

박경리는 통영 출신으로, 『토지』로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작가다. 개인적 비극(전쟁, 남편의 옥살이, 아들 사망, 외동딸의 시련)을 겪으며 한국인의 정서와 삶의 본질을 깊이 탐구했다.

『김약국의 딸들』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혼란의 시대 속에서 여성들의 욕망과 한계, 가족과 사회의 균열을 통해 역사의 큰 물줄기를 미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 마무리 — 시대에 묻힌 여성들의 목소리

『김약국의 딸들』은 단순한 가족사 서사가 아니라, 시대의 격변 속에 묻힌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다섯 딸의 각기 다른 욕망과 운명은 한 사회의 단면이자,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또한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교차하는 혼란 속에서 여성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욕망하고, 순응하고, 저항하고, 적응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한국 여성의 역사적 위치와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학적 텍스트로 평가할 수 있다.

 

https://youtu.be/AIBAWsEmbNg?si=npVKR9Oire5Xwo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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