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자신의 반대 형상인 자유와 합치를 이루는 순간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다. 군사적 폭력은 오늘날 익명화된, 탈주체화된 시스템적 폭력에 자리를 내준다. 이러한 폭력은 폭력으로 드러나지 않 는다. 그것 자체가 사회와 하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서론, 한병철, <폭력의 위상학>
한병철의 글을 보고있으면 가슴이 답답하다. 그 시선과 사유를 따라가다보면, 그 정곡을 찌르는 핵심을 때리는 글을 읽다보면, 길을 잃은 느낌이 난다. 정확히는 길을 잃은 것을 깨달은 것이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가 편했다. 지금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폭력이라 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장면은 더이상 이 시대의 폭력이 아니다. 이 시대의 폭력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자유롭다 안전하다 느끼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폭력을 당하고 심지어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공동체적인 것이 침식됨에 따라 남은 것은 오직 나의 몸뿐이기에, 이 몸만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건강하게 유지 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상적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는 주목받기를 갈망하는 자아의 전시가치외 건강가치밖에는 님아 있지 않다. 벌거벗은 삶은 무엇 때문에 건강해야 하는지를 답해줄 모든 목적론, 모든 '위하여' 를 파괴해버린다. 건강은 자족적인 가치가 되며 모든 내용을 상실한 채 목적없는 합목적성의 공허에 빠진다. -36p, 한병철, <폭력의 위상학>
사유가 사라진 곳에서는 건강만이 남는다고 했던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몸뚱이, 내가 폭력을 행사하고 착휘해야하는 나의 유일한 자본을 유지해야하기에 우리는 강박에 휩싸인다. 어쩌지 못하는 몸뚱이를 입고 상실한 몸뚱이 안의 무언가를 찾아다닌다. 공허하고 혼란스럽다. 소유하고 있지만 소유하지 못했기에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같다.
생산의 수준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자기 착취가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과 함께 이루어지 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 는 스스로 불타버릴 때까지 (번아웃)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 때 발생하는 자기공격성은 드물지 않게 자살의 폭력으로 까지 치닫는다. 이로써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신에게 겨냥하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서론,한병철, <폭력의 위상학>
자본주의는 비인간화를 더 가속화시키고 당연하게 여긴다. 인적 자본에 의한 성과주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간 대 인공지능의 경쟁구도를 구성하며 덤빌 수 없는 무한을 향해 인간의 성능을 탐색하고 불태운다. 인간은 더이상 존재가 아니라 관리에 따라 성과치를 측정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따라갈 수 없는 개체와의 경쟁에 무기력과 후유증은 필연적이다.
시스템이 강제 하는 바를 스스로 하고 싶도록 원하게 만드는 데 성과사회의 지배 기술의 본질이 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이 초자아의 방식이라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이상자아의 방식이다. 그 방식은 전혀 폭력적이지도 강제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다만 유혹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긍정성의 폭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혹이 결국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과주체는 결국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적 질병에 빠짐으로써 시스템의 요구를 자신의 요구로 삼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폭력이 가하는 고통과 피해는 부정성의 폭력과는 달리 오직 후유증의 형태로만 나타난다. 성과주체는 어쩌면 마비된 주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폭력을 폭력으로 느끼지 못하고 강제를 자유로 착각한다.
-역자 후기, 한병철 <폭력의 위상학>
유발하라리의 호모데우스가 문득문득 떠올랐다.
전시할 만한 것에만 가치를 두고 그것을 지켜봐줄 감시자들의 건강을 보위하며 그저 건강이 최고야. 저 사람봐. 유일하게 통제가능한 몸을 가꾸는 일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 알아? 나는 얼마나 대단해? 쉬지않고 이렇게 한다고. 그래도 나는 지치지 않아. 나 정도는 되어야 인공지능과 견줄만하지. 대담하게 이야기한다. 그 불편함을 견디는 것만이 할 일이다. 그 자체가 이 책에서 얻은 성과일 것이다.

과거 어느 때도 오늘날만큼 삶이 덧없지는 않았다. 이제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재의 결핍 앞에 직면한 인간은 신경과민에 빠진다. 과다행동과 삶의 가속화는 죽음을 예고하는 저 공허를 보상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생존의 히스테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살 줄도 죽을 줄도 모르는 산 송장들의 사회다. -36p, 한병철, <폭력의 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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