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아주 오래된 예전에 타르코프스키를 너무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나무를 보면서 하루종일을 벤치에 누워있었다고 했다. 하늘에 비춰지는 나무를 계속 올려다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희생>에서는 섬에 사는 수학 교사 알렉산드르가 계시를 받고 자기가 가진 소중한 것을 버리면 인류가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로부터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안렉산드르는 자기 집을 불태운다.
-정성일 기도하는 영혼 해석 <나는 믿는다,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이 모든 것을>

정신을 차리고 보니 20여년이 훌쩍 지났다. 나의 20대 스마트폰도 없고, 유투브도 없던 시절, 친구와 지루하고도 심오한 영화를 보고 졸다가 또보고 이야기하다가 또 보고 이야기하는게 재미있었던 시대. 지금은 영화를 보고 나서 검색하면 쏟아지는 다양한 해석과 정보들이 있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각자가 느끼는 솔직한 느낌이 오고가던 시기였다. 누군가의 해석이 완전히 배제된 나만의 해석, 나만의 느낌, 솔직함. 허세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날 것 그대로였던 시대. 그런 시대를 살아온건 어쩌면 축복일것이다.
그때 영화이야기를 하면 그 끝에는 항상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서있었다. 어떤 영화에서 시작을 해도 결말은 타르코프스키. 우리는 타르코프스키 영화에 대한 해석의 불가침성, 즉 우리는 그 영화를 결코 해석할 수 없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며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다. 알 수없는 신비로움과 종교적인 체험이 있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나와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 뛰쳐나간 나의 친구는 어떤 지점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내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이야기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고 나는 그 친구가 이야기할 때마다 주위를 살폈다. 그런 불경한 이야기를 해도 돼? 그 친구는 담담했고 내 심장은 쿵쿵댔다.
1986년에 개봉한 타르코프 스키의 영화를 20년 뒤쯤 봤고, 그 뒤로 또 20년이 지난 지금 리마스터링 된 '희생'을 아트나인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남은 두자리 중 한자리를 예약하고 앉아서 감상을 준비하는 짧은 시간동안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타르코프스키의 <기도하는 영혼>이라는 책은 다큐멘터리 영화 <Andrey Tarkovsky. A Cinema Prayer IDFA>의 대본집이다.
인간은 선뿐 아니라
악도 품고 있다.
우리 존재의 목적은
무엇보다 우리 안의
악과 싸우는 데 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이유다.
우리는 악과 싸울 수도,
우리 안의 악이
승리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의 책무이다.
최악의 상황은
내 안의 악이 아닌
타인의 악과 싸우기 시작할 때이다.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희생 1986, <기도하는 영혼> 127쪽
타르코프스키는 이 시에서 앞으로 찰영하게 될 <희생>이라는 영화에 대해 예고했다. 또 이 영화는 앞서 만든 영화<노스탤지어>의 논리적 진화라고도 했다. 주인공은 수학교사 도메니코이며, '나무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매일 물을 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고 했다.
희생 1986, 이 영화는 피할 수 없는 예기치 못한 사건에 직면했을 때 개인의 책임을 이야기한다.
...
개인의 참여, 현대사회의 진행과정, 그리고 그를 사건의 중심으로 되돌리려는 열망에 대해 긴장감 있고 극적인 방식으로
한 가족의 이야기를 시적으로 서술하는 비유이자 우화다.
...
예술의 목적은?
왜?
그것은 좋은가, 나쁜가?
그것은 생산적인가?
아니면 그저 예술일 뿐인가?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예술은 기도다.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기도하는 영혼> 127쪽
그가 영화에 사용하는 음악은 중요하다. 그가 쓴 글에 따르면 "Music can be used to produce a necessary distortion of the visual" 즉 음악은 관객의 인식 안에서 시각정 정보에 필요한 왜곡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희생에 깔리는 마태의 수난은 묘사할 수 없을정도로 처연하며 아름답고, 슬프다.
Bach - Erbarme dich, mein Gott from St Matthew Passion BWV 244 | Netherlands Bach Society - YouTube
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가 우화의 형식을 빌었다고 햇다.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의미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기를 바랬던 것 같다. 그는 그의 자서전 <봉인된 시간>에서 이 영화의 초안 제목이 '마녀'였다고 했는데 이 제목을 듣는 순간 주인공 알렉산더의 부인이 떠올랐다. 그는 또한 이 모든 장면들이 '인간의 물리적 구원'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했다.
이 영화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은 구원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그렇다고 하루하루 기도하는 삶을 통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마치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주는 일, 우리가 삶을 대하는 자세는 그렇게 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술가로서도 소명의식을 가지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술을 해야한다고 말했던 그의 작품이 숭고하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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