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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생각한 것

<돌봄의 역설> 은근슬쩍 밀어낸 당신의 책임에 대하여

by BookSayu 2026. 3. 10.
돌봄은 원체 불편하고 더럽게 느껴질 만한 어떤 것이다. 먹고 자고 배출하는 것을 다루고 아픈 부분을 어루만지는 것이 돌봄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더러움'때문에 돌봄은 신성하다. 그 누가, 그 어떤 노력이 우리의 더러움을 다룰 수 있는가. 자녀의 뒷정리를 하는 부모의 배려가, 부모를 챙기는 자식의 염려가, 병원에서 환자를 지키는 의료진의 심려가 우리 몸의 더러움을 상대한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신성함이라면 돌봄은 원래 그 자체로 신성한 행위였다. 우리가 그것을 천하게 만든 것이다. 그 가치를 폄하하고, 취약한 집단에게 전가하고, 결핍된 환경으로 몰아넣음으로써 - 김준혁, <돌봄의 역설> 본문 중에서

 

40대 중반이 되니 머리가 책임감으로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다. 의료윤리학자 김준혁이 쓴 이 돌봄의 역설이라는 책은 돌봄에 대해 정의 내리며 우리가 그토록 돌봄을 버겁게 여기는 이유에 대해 그리고 이리도 힘들어지게 된 연유에 대해 차근하게 설명해 준다. 도서관에서 고른 책이 좋은 글일 때, 그 기쁨은 말로 할 수 없다. 최근에는 그것들 중에 의사, 판사와 같은 소위 공부 깨나 해서 사회적 지위를 얻은 사람들이 쓴 글을 자주 만난다.  어릴 적에 공부밖에 안 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쓴 정갈하고 깊이있는 글을 보다 보면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글까지 잘 쓰는지 하는 생각과 그렇게 공부를 했으니 이렇게 글을 잘 쓰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작가는 부모로서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아이의 신체와 정신의 필요를 채우면서 아이가 바라는 대상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도 부모가 자녀가 잘될 것을 바라며 어떤 결과로서 그것을 보상받으려는 심리는 잘못된 것인지 묻는다. 그리고 칭찬을 바라며 금전적 보상을 바라며 돌보는 것을 이상하다 여기는 것이 자신에게는 오히려 이상하다고 한다. 

 

과거 돌봄은 여성의 무임금 가사노동에 의존했다. 여성이 사회로 진출한 현재, 돌봄 노동의 자리는 그대로 비어버렸다. 간병인, 가사도우미 등 돌봄 노동자가 그 자리를 일부 채우긴 했으나 돌봄의 지위는 여전하다. 돌봄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대표적인 노동이다. 하지만 모두 돌봄을 필요로 한다. 아이를, 노인을 환자를 돌 볼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인정받지 못하지만 누구에게나 필요한 돌봄이기에 우리는 고민한다. - 김준혁, <돌봄의 역설> 본문 중에서본문 중에서 

 

워킹맘으로 하루하루를 죄책감과 버거움으로 보내면서 내 유년시절과 아이의 돌봄이 오버랩되는 경험을 했다. 양친이 다 사업으로 분주하시던 내 어린시절, 나에겐 돌봄이 부재했다. 외형적으로는 풍족한 삶이었지만 내 정서는 말라 비틀어지도록 빈곤했다. 그러던 내가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고 나니 아이가 겪을 하루하루가 눈앞에 펼쳐지고 그걸 알면서도 그냥 두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많은 고민 끝에 회사를 관두게 되었는데, 이게 아이를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나를 위한 부분이 많이 컸던 것 같다. 저자는 조너던 화이트의 <나쁜 교육>을 소개하며 아이들을 최대한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양육과 교육방식이 아이들을 나약하게 만든다는 '안전주의' 주장이 '돌봄'을 위해 옆에 있는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공격한다고 말했다. 이에 나는 깊이 공감하고 있으며, 아이를 위해 일을 관뒀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키워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며 비난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아이를 집에서 키워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것은 가족만이 느낄 수 있는 변화였다. 그리고 엄청난 자기 희생이 수반되었다. 또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나와 같은 이유로 같은 선택을 하는 엄마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에서 밀려났다는 또는 내가 스스로 나의 커리어를 포기했다는 얇은 수치심을 덮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 오히려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의 공간에 갇히는 경우가 많았다. 

 

돌보는 이가 보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물론 제공한 돌봄과 똑같은 가치의 대가를, 또는 더 많이 돌려받으려고 계획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돌봄의 크기를 어떻게 잴 것인지도 문제다. 내가 제공한 돌봄과 그 돌봄을 받은 사람 이 돌봄의 무게를 다르게 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돌봄에 보답을 기대하는 마음 자체가 그렇게 문제일까 - 김준혁, <돌봄의 역설> 본문 중에서

 

그래도 인간인지라 책임감이나 여타 다른 이유에 의해 자신이 집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가족을 위해 하는 부분이 커지다 보면 보상에 대한 욕구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유년시절에 아이를 잘 돌보지 않았던 부모들도 내가 세상에 너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것들을 요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내가 나의 젊은 시절을 가족들의 돌봄을 위해 보내는 것에 대해 감사함을 요구하게 되고 이것이 정당하다고 까지 느껴진다. 특히나 그 세세하고 잔일거리 많은 돌봄의 부재를 느껴본 아이라면, 가족이라면 감사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게 숭고하고 멋진 모습일수는 있으나 그것을 기대하는 마음을 비난할 수는 없다. 

 

저자는 의료인이라는 직업으로 돌봄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탐구했음을 그의 글에서 느낄 수 있다. 단순하게 의사라는 '업'에 그치지 않고 환자를 '돌봐야'하는 것이 의사의 일이라고 또 돌봄은 웰빙이 아닌 피어남이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죽기 전에 꼭 한번 진료를 받아보고 싶다. 

이전에는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답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어른이 되어 이런저런 공부를 하면서 도달한 삶의 결론이었다....대신 나는 삶의 목표가 행복이요 웰빙이라는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 너무 오랜 전통에 입각한 관점이고 또 이전에 내가 한 말을 뒤집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전에 쓴 책에 삶의 목표는 행복이고 의료윤리란 그것을 의료적 상황에서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행복 대신 무엇을 놓아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찾은 것이 '피어남'이었다. - 김준혁, <돌봄의 역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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