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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기록

<세일즈맨의 죽음> 인물 분석, 고전비극과의 구조적 유사성에 대해

by BookSayu 2025.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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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과 나무와 지평선을 말하는 듯 가냘프고 고운 플루트음악이 들린다. 이윽고 막이 오르면 - 외판원의 집과 그 집을 둘러싸고 우뚝 솟은 모가 난 아파트의 형체만이 보인다. 오직 푸른 저녁 하늘빛 만이 집과 무대 앞부분에 깃들이고 그 주위는 영롱한 오렌지빛이다. 차차 밝아짐에 따라 육중한 아파트의 지붕과 그 앞의 곧 무너질 것만 같은 조그만 집의 모양이 뚜렷해진다. 현실에서 솟아난 것 같은 꿈의 영기가 무대 위에 흐르고 있다. - 제1막 첫 장

 

첫 장면에서 부인 린다는 뭔가 서늘한 징후를 느끼고 침실에서 나와 윌리를 찾는다. 당신이야?! 막 귀가한 윌리는 말한다. 나요. 놀랄 것 없소. 어디서 사고 내고 온 거 아니냐는 린다의 노파심을 타박하며 윌리는 평소에 해오던 일들이 체력적으로 이제 너무 힘들어져버렸다고 푸념한다. 린다는 그를 걱정하며 사장에게 그의 고충을 털어놓으라 조언한다. 외판직에서 내근직으로 전환해 달라고 요구하라고 한다. 윌리는 한평생 집세를 치르느라 죽도로 일했는데 내 집을 사니(buy) 이제 그 집에 살(live)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한다. 

“Work a lifetime to pay off a house. You finally own it, and there’s nobody to live in it.”
— Willy Loman, Death of a Salesman

현대적이라는 것은 고도로 발달한 산업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생기게 마련인 물질만능주의나 소외당하는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 이것을 물질주의의 희생물이 된 외판원 윌리 로먼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버느라 한평생을 노력하지만 노년에 그의 손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에 그의 부인 린다가 말한다. '공수래공수거야 여보'

“Life is a casting off.”
— Linda Loman, Death of a Salesman

 

출처 : 쇼앤텔플레이, 와이엠스토리

 

<세일즈맨의 죽음>과 고전 비극의 구조적 유사성

 

1) 비극적 영웅의 몰락

난 흔해빠진 사람이야! 당신도 그렇고! 
- Biff, Death of a Salesman

고전비극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영웅의 몰락으로부터 시작해 관객에게 연민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이 희곡이 윌리로먼 역시 아메리카 드림과 경제활황이었던 미국의 부흥기를 함께한 세일즈맨이 사업과 사회 구조에 변화에 따라 쇠락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하마르티아(hamartia)는 고대 그리스어로 '비극적 결함'이라고 번역되며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시학>에서 다룬 비극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 주인공 윌리의 hamartia는 성공이 성실함과 실력으로 쌓는 것이 아닌 외모와 개성, 인기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경험적 확신에서 오는 현실부정, 자기부정, 성공신화에 대한 콤플렉스로 자신을 다른 위대함에 끼워 맞춰 생각하는 자기고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전비극에서 주로 영웅이 대항하는 것은 자신의 슬픈 운명(fate)이다. 오이디푸스, 헤라클레스, 햄릿이 그랬듯이 자신의 지고 있는 비극의 굴레를 깨닫는다는 드라마틱한 설정은 세일즈맨에서 급격히 변한 사회적 시스템 더 이상 경쟁력 없어진 구닥다리 판매방식 등으로 대체된다. 스스로 노력하지만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 구조 속 인물로 윌리의 몰락은 수순대로 흘러간다. 

 

2) 주체와 타자의 문제 

윌리는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한 사람으로 자신이 비치고 싶은 상을 만들어 그것에 자신을 끼워 넣어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타자'의 시선이란 실체적이지 않고 허상적이라는 점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그는 자신의 진짜 욕구를 알지 못하고 사회가 정해준 기준에 따라 잘 살아온 인물이다. 신체가 쇠락하자 그의 정체성은 분열한다. 그것이 현실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이것은 한편으로 고전 비극의 영웅들이 '신의 뜻'이라 해석하고 주체성을 스스로 버려버리는 구조와 유사하다. 신이 나 운명이 아닌 사회적 규면과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주체를 상실하고 저항하고자 하지만 그의 육체적인 한계로 인해 무력해져 버린다. 

 

3) 여기서 질문, 윌리는 '영웅성'을 가지고 있는가?

윌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영웅은 아니다. 현대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것을 영웅이라고 느끼는 가가 여기에서 나타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끝까지 매달리는 우직함,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비극적 헌신, 세계의 부조리에 부딪혀보지만 실패를 경험하는 용기에서 영웅의 원형은 아니지만 영웅적인 기개와 용기를 드러내는 저항의 행위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현대인들은 영웅사를 보고 감동하지 않는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서는 목숨을 걸고 저항할 운명도 없을뿐더러 개인의 희생이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에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저 변화하는 사회에 돌을 던져본 그 용기, 그 작은 저항조차도 힘든 시대에는 그것이 감동의 기제가 된다. 

 

4) 코러스 역할을 하는 부인 린다의 목소리

“He’s not just a piece of fruit!” -Linda, Death of a Salesman

부인 린다는 이 작품에서 사건을 해설하고 관객이 이해해야  할 감정의 방향을 제시하고 윌리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역할을 한다. 이 부분이 우리가 고전비극에서 보는 코러스의 역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관객에게 '어떻게 느껴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구조는 액자의 구조를 가지게 하여 비극성을 정당화해 이입시키는 안내 역할을 한다. 또한 윌리가 왜 그렇게 망가졌는지 무엇이 그를 괴롭히는지 왜 우리가 그를 불쌍히 여겨야 하는지를 말해줌으로써 관객을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인다. 

'세일즈맨의 죽음' 공식 포스터 (한국)

 

윌리 : 자기기만에 갇힌 진실성이 결여된 인물

오늘이야말로 진실을 들으셔야 해요 - 우리 부자가 어떤 존재라는 걸요.... 우린 이 집에서 단 십 분도 진실한 얘기를 해본 일이 없어요.-비프

실존주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윌리는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성공기준에 종속되어 진실성이 결여된 공허한 인물이다. 반면 비프는 현실을 직시하려하고 자기 자신을 탐색하며 진정성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가진 인물이다. 이 둘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환상과 거짓 위에 세워진 관계에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려고 해도 막아버린다. 받아들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욕망을 서로에게 투사하며 포장한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진정성이 결여된 삶을 살아온 윌리에게 비프는 자신의 꿈이 투영된 더 나은 자신이기를 바랐기에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실존적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잘 나가는 세일즈맨, 어디서나 환영받는 인기 있는 사람, 자식이 존경할 만한 아버지, 타인의 기준을 본질로 삼아 스스로가 만든 허상에 갇힌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다 못해 그 기억을 조작하는 장면들(경찰이 주차 딱지를 붙이는 것을 자기의 차를 지켜준다고 표현), 들어가기 어려운 곳도 환영받는 프리패스였다는(실은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여러 가지 로비를 통해 이루어진 것임에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자기기만에 갇힌 인물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비프 : 실존적 충돌, 진정성을 향한 몸부림

그의 아들 비프는 떠돌아다니면서 직업을 찾아다녔지만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10년이 지난 지금 주급 35달러의 농장일을 돕고 있다. 34살이나 된 그의 첫째 아들 비프는 한때 윌리의 가장 큰 자랑이었다. 훤칠하고 잘생긴 아들, 미래가 촉망되는 미식축구선수, 고등학교 때 비프는 성실하지 못했다. 여자아이들을 함부로 대하고 학업에 충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에게 조언해 주던 친구 버나드에게 아버지인 윌리는 비프보다 더 화난 채 이야기한다. 본인의 아들들은 지금 착실히 공부하는 버나드보다 5배는 더 많이 버는 직업을 얻어 살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아도니스처럼 미끈하게' 생겼기 때문이라고.

비프는 아버지와의 위선을 모두 벗기고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한다. 동생 해피 때문에 좌절되긴 했지만 해피가 말리지 않았더라 할지라도 진실을 말할 수 없게 유도신문하는 윌리는 넘어설 수 있었을까? 자신이 신념처럼 믿고 따르던 아버지의 추악한 모습을 알게 된 후 비프는 방황을 시작한다. 그 방황이 비프를 더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과 선택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단할 것 없는 주급 35달러의 농장일이다. 그것으로 살아내고 싶지만 그대로 살고 있게 만들지 못하는 것은 역시 사회적 굴레이다. 서로에게 진실할 수 없고 자신의 소신대로 진실되게 살 수 없는 것이 이 작품의 실존적 비극인 것이다. 

“I’m nothing! Can’t you understand that?” - Biff, Death of a Salesman

티모시 샬라메 세일즈맨 비프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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