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이> 인간 스스로의 구원이 가능한가, 김영하의 말, 추천사가 돋보이는 에세이.
나는 깨달아야 한다. 나는 아버지의 원대한 계획으로 태어났고, 아버지가 나에게 맡길 임무들을 완수해야한다.
내가 아버지의 계획만큼 해내지 못할까봐 두렵다 나는 너무 허약하고 너무 서툴고 너무 어리석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무섭다. 거인 같은 몸집, 커다란 머리, 가늘고 긴 두 손, 강철도 뚫을 듯한 눈길을 가진 아버지 앞에 서면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완벽한 아이, 모드 쥘리앵

이 책은 정말.. 고통스럽다. 고통스러움 뒤에 환희가 느껴지는 책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픽션이라면 이런 카타르시스가 가능했을까. 거짓말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 그녀, 모드 쥘리앵에게 경의를 표한다. <완벽한 아이>는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학대한 악귀같은 부모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낸 어린 모드의 이야기다. 모든것들을 차단하고 통제한 시스템 속에서도 강인하고 진실되게 살고자하는 인간의 투지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여전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수많은 학대 속에서, 그것이 폭력인지 사랑인지 알지 못한채 파괴되는 자아를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을 많은 작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완벽한 아이>는 아버지가 조각하는 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정말, 실제로, 아버지와 어쩔 수 없는 부역자인 어머니는 아이의 살을 발라 내고 뼈를 깎는다. 독자는 사람이 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이 실현되는 과정, 부모가 자녀를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지옥을 만날 수 있다. 구체적 묘사가 뛰어난 작품인데도, 모든 문장이 비유로 가득 차 있다. 시의 집적,오랫동안 내 몸에 기거할 글을 만났다. -정희진,추천하는 말 <완벽한 아이>
포기하지 않는 삶은 더이상 벗어날 수 없는 그 굴레를 벗어나는 순간을 끌어당긴다. 가해자 역시 언제나 그렇듯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더없이 사악하고, 세상은 더없이 위험하다'는 세계관을 가진 아버지는 자신만의 집을 만들어 두여자를 가두고 조종한다. 프리메이슨을 교리로 받아들였다는 점과 니체의 '초인'사상에 심취한 가혹한 아버지에게서 자란 남성이라는 점, 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를 가진채로 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는 점, 사업적으로 성공해 큰 돈을 벌었다는 점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세상에 나온 모드는 아버지가 죽은 뒤 상처들을 꺼내 치유의 과정을 거치고(표현이 너무 부드러워 미안할 정도) 자신처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심리치료 전문가가 되었다.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억압과 지배가 그를 짓눌러도 타인을 안을 수 있는 품을 만들어 날아간다. 20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끔직한 일들을 써내려가는 모드의 어조가 읽는 모두를 감탄케한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
현재형의 간결한 문장들로 주어지는 모드의 목소리가 절제될수록 독자들은 더 깊이 분노하게 된다. 이 책의 회고는 완전히 아문 상처를 되살리는 회고가 아니고, 반대로 여전히 벌어져 있는 상처를 둘쑤시는 회고도 아니다.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그러나 절대 멀어지지는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되짚어나갈 뿐이다. 그리고 독자는 마치 최면으로 불러낸 모드의 과거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처럼 숨죽인 채로 따라갈 뿐이다. -옮긴이의 말, 윤진 <완벽한 아이>
모드의 상처적 과거를 마주하는 것은 끔직한 일이다 그것보다는 경도의 나의 과거를 마주하는 일과 같다. 그런 동질적 아픔이 없는 사람이라면.. 너무 부러울 것이다. 누구나 작거나 크게 지배당해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영혼을 휘두르려고하는 저항하기 어려운 힘 앞에서 패대기 쳐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눈을 감으면, 우리가 생을 마감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래도 굴하지않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존재라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중에 나처럼 타인에 의한 정서적 '지배'라는 끔찍한 함정에 빠졌던 사람들을 도울 때 큰 역할을 했다. 그런 식의 지배에는 우선 포식자가 있다. 포식자는 오로지 자신의 정신세계, 믿음, 욕구, 욕망만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신인귀과 같다. 그에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수단이거나 장애물일 뿐이다. 포식자가 멋잇감을 만나면 우선 지배를 위한 함정을 만든다. 무엇보다 상대에게 자신과의 관계가 절대적 사랑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런 뒤 상대를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다루면서 서서리 소유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모드 쥘리앵 <완벽한 아이>
인간의 영혼을 소유할 수 있을까. 작고어린 아이에게 통제권을 '부모'라는 이름으로 행사할 때 거리낌이 없다. 아이의 안전과 미래를 위한 다는 명분으로 감시가 용인되는 분위기에서 아이의 영혼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방목하지 않으면서 지켜봐주면서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내가 제시하는 길이 아이에게 최선의 '좋은 길'임을 나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아직 작은 아이는 나를 보면 따라와 주지만 그아이가 어른이 된 뒤에 지금의 여정은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이런 불안을 딛고 아이와 손을 잡고 길을 간다. 눈을 마주치며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니?

김영하 작가 북토크에 다녀왔다. 글도 잘쓰고 말도 잘하는 작가가 세상에 몇명이나 있을까. 그러면서도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사랑받고 호는 많아도 불호는 별로 많지 않은, 그러면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그의 젠틀함과 무던한 어투 뒤에 덮어져 있던 세계에 놀라게 되는 그런 작가다.그는 북토크의 시작에서 인생의 가장 큰 부조리는 '우연히 우연한 어떤 곳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한 번 밖에 없는 것도 억울한데 내가 정할 수 없는 생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출생은 어떤 한 편으로는 납치에 가깝다고 했다. 내리기 힘든 열차에 올라타서 그것을 견뎌내는 일도 쉽지 않은데 그 곳에서 의미를 찾고 소명을 찾아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인생이라고도 했다. 어떤 이는 자기가 인식을 가지기도 전에 자신의 종교관과 세계관을 선택당한 채 살기도 하는 이 삶...... 그가 왜 이런 시작으로 북토크를 시작했는지 그가 판권을 사서 출판했다는 이 책을 보고서야 알게되었다.
갇힌 자의 영혼은 누구의 것인가? 가둔 자의 것인가, 갇힌 자의 것인가.....그러나 아주 드물게, 너무나 강력한 생의 의지를 가진 존재들이 있고, 어느 순간, 이들은 자신을 가둔 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만 두고, 진지하게 탈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둔 자들이 심어준 죄책감의 굴레도 벗어던지고, 남겨두고 가게 될 다른 피해자에 대한 연민의 마음까지 내려놓아야 이 탈출은 성공할 수 있다. 탈출을 꿈꾸는 갇힌 존재에게는 그러므로 모순적인 행동이 요구된다. 자기 안에 남아있는 인간성을 지켜내면서, 동시에 자신을 구속하는 윤리적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던질 만큼 비정해야 한다. 어떻게 그들의 의도를 알아내고 내 안에 남아 있는 인간적인 면을 지킬 것인가? - 김영하 추천의 말 '내 영혼의 주인은 누구인가' <완벽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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